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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MBA

[김지영 칼럼] 05. 중국 생활의 시작

 

 

 

05. 중국생활의 시작

 

 

마카오에서 온 유학생이 있었다. 청화대 학교 캠퍼스를 보더니 캠퍼스가 마카오보다 넓다고 했단다. 나는 아직 마카오를 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조금 과장되긴 했어도 청화대 캠퍼스가 얼마나 큰 지 잘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막 청화대 캠퍼스 생활을 시작한 당시 내가 느낀 기분도 그랬다. ‘아니 학교 캠퍼스가 왜 이렇게 큰거야?’ 일단 자전거 없이 도보로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학교 정문에서 내가 사는 외국인 기숙사 건물까지 자전거로 15분거리이다. 캠퍼스 안에 강이 흐르고 큰 호수가 있다. 교직원용 아파트와 부속 초등학교, 중학교도 캠퍼스 안에 있다. 또 학교안에 없는 게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편의시설이 다 있다. 시장, 슈퍼, 식당, 카페, 이동통신회사, 우체국, 은행, 병원, 서점, 꽃집, 세탁소, 목욕탕, 미용실, 수영장, 볼링장, 자전거 수리점, 잡화점등등.

 

기숙사에 짐을 풀고나니 여기서 생활하려면 이것저것 사고 준비해야 하는 게 한 두개가 아니었다.같은 날 내 방 맞은편 방에 I반으로 입학한 동기 희선언니가 들어왔다. 서로 한국사람인지 알아보고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했다. 고향도 같고 이전 직장도 같은 그룹사고 공통점이 많아서 금방 편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쭉 희선언니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언니와 정말 좋은 인연으로 만난 것 같다. 우리는 일단 같이 자전거 부터 사기로 했다. 자전거가 있어야 뭘 사든 뭘 알아보든 이동이 가능했다. 기숙사 1층 데스크에 비치되어 있는 캠퍼스 지도에 표시된 가장 가까운 학생슈퍼로 가 적당한 가격의 자전거를 한 대 샀다. 유학생활동안 탄 4대의 자전거 중 첫 자전거였다. 자물쇠와 열쇠도 같이 사고 캠퍼스를 한 바퀴 돌았다.

청화대 교내에는 작은 과일점이 많다.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우리처럼 한 바구니에 몇 개씩 담아 팔지 않고 무게 단위로 팔기 때문에 적은 양을 사기에 편하다. 이제 과일을 열심히 먹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과일칼을 사려고 하는데 학생슈퍼에 과일칼이 팔지 않았다. 구경도 할겸 언니와 학교 남문 앞에 있는 슈퍼에 갔는데 역시나 과일칼이 없었다.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마침 북경 올림픽 기간이라 정부에서 칼종류 판매를 금지했다고 한다. ‘이런, 올림픽 기간이라 칼을 살 수 없다니. ‘역시 중국답다는 생각을 했다. 덕분에 나는 올림픽 폐막식이 지나고 나서야 사과를 깎아 먹을 수 있었다.

생전 타지않던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보았으니 둘 다 배가 고팠다. 눈에 뜨이는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음식을 시키려고 하는데 뭘 시켜야 할지 도통 몰랐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우리는 한국식 중국집을 생각하고 볶음밥 두 개를 시켰다. 주문을 받던 종업원의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우리가 뭘 잘 못했냐는듯다시 자신있게 볶음밥 두 개 주문을 확인했다. 당시에는 중국에서 음식 주문을 할 때는 요리를 위주로 시키고 볶음밥 같은 양이 많은 주식은 하나만 시켜서 나누어 먹는 다는 개념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볶음밥이 별로 맛이 없었고 각자 한 그릇씩 먹기에는 양이 심하게 많았지만 우리는 뿌듯하게 먹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기숙사에 돌아왔다.

 

그 후 교내 인터넷 신청장소에 가서 인터넷을 신청하고 식당카드와 교통카드 학생증을 만들었다. 핸드폰 판매 대리점에 혼자 가서 잘 모르지만 대충 설명을 듣고 가장 저렴한 노키아 스틱형 핸드폰을 골라 전화번호를 개통했다. 그래도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교내 식당카드

 

기숙사는 조금 좁긴 했지만 현지 중국인들 기숙사와는 달리 호텔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나에게는 여러모로 편리하고 안전한 공간이었다. 매일 하우스키핑에서 청소를 해 주었고 1주일에 한 번 침대시트를 갈아주었다.데스크에서 출입을 제한 하기 때문에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고, 궁금한 게 있거나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으면 24시간 데스크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문의할 수가 있었다. 다만 좁은 공간에 비해 당시 한달에 약 2000 RMB가 넘는 비용은 부담스럽긴 했다. 그래서 많은 유학생들은 기숙사 생활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고 공간이 넓은 외부 아파트를 선택해 나가곤 했다. 가족들이 같이 오는 경우 또 어쩔 수 없이 외부에 아파트를 임대해 사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밖에 나가는 것 보다는 교내에 있는 것이 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고 반 친구들이랑 지내기도 좋은것 같아 학교를 떠날 때 까지 기숙사 생활을 했다.

 

 

* 외국인 기숙사 내부 모습

 

 

새로 시작한 생활이기에 여러가지 모임이 활발하게 조직되었다. 어딜가나 뭉치기 좋아하고 모여서 밥먹고 술마시기 좋아하는 한국인들 모임은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청화대 MBA 한국인유학생 모임이 있어 서로 인사하고 각자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다. I,F,P반을 합쳐 한국인 유학생들은 약 30명 정도 되었다. 07학번 선배들도 나와 학교생활, 수업 등에 대한 여러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다들 학력으로든 직장경력으로든 빵빵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70% 정도는 회사의 스폰서로 들어온 케이스였고 나머지 30% 정도는 자비로 온 사람들이었다. 연령대가 다양했지만 자비로 온 사람들은 거의 삼십대 초반 이하의 나이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나이로 막내였다. 나는 조금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남들 보다는 빨리 결정했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 조금 위안이 되었다.

현지 중국인 친구들과의 모임도 많았다. 반대표들의 이메일, 단체문자 모임공지가 끝없이 날아왔다. 놀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한 번 모이면 끝장을 보겠다는 식으로 밤새 게임을 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당시에는 이 모습들이 조금 낯설고 중국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적극적으로 친목을 다지나?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당시 이 친구들도 새로 시작되는 MBA 생활에 얼른 친분을 쌓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겠다는 욕구가 강했던 것 같다. 초반에 이런 잦은 모임과 회식도 후반으로 가면 점점 뜸해지고 각자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내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또 친한 소그룹별로 끼리끼지모이는 현상도 심해진다.

 

정신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몇십명씩 만나다 보니 이름 외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특히 중국 이름은 왜 이렇게 외우기 힘든지.. 풀타임 반은 1반과 2반으로나뉘어 총 106명이었다. 나는 F2반에 배정되었는데 우리반은 총 53명이었고 그 중 3명이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내가 우리반에 3명 밖에 안되는 유학생 중 하나이다 보니, 상대방은 내 이름을 알고 있는데, 나는 상대방 이름이 뭔지 모르기 일쑤였다. 그렇게 정신없는 가운데 수학 예비수업이 시작되었다.

 

 

 

 

 

칼럼니스트 김지영

 

김지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에버랜드에 들어가 푸드컬처 사업부 소속으로 일하다가 중국 칭화대학교 MBA 과정에 유학 갔다. MBA 과정을 마치고 락앤락의 상하이 현지법인에서 B2B팀장으로 3년간 근무한 뒤 독립해 상하이에서 씨케이브릿지 컨설팅을 설립했다. 저서 : <사막여우 중국MBA 가다>2013.12, 필맥출판사